마음 속 천칭의 무게
법원의 상징을 아는가?
모르더라도 천칭은 들어봤을 것이다. 천칭은 공정함을 상징하고 진실을 판가름한다.
아마도 당신은 살아오면서 거짓을 말할지 고민한 적이 있을 것이다. 작은 것이라도 말이다.
어떤 판단을 했더라도 진실과 거짓을 천칭으로 재어 본 것이기에 마음속 천칭을 가진
것이다.
그럼 묻겠다. 당신의 “천칭”은 무엇인가?
아니, 당신에게 “진실”은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당신의 말은 하나의 무기이자 계약임을. 당신은 말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살려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말”은 무엇보다 강한 무기이며, 약속을 만들고 이행하기에
계약이다. 나는 이런 “말”을 천칭으로 정의한다.
나의 눈에 비친 세상은 끊임없이 계약하고 이행을 바탕으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무조건 진실을 말해야 한다. 물론 반박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거짓을 말해도 된다고 한다면 당신은 이 사회가 주는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
태초의 인류는 부족사회였고 사회를 발전시키며 유지한 토대는 약속이자 계약이다.
아침에 봤을 깨끗한 거리도 누군가가 천칭에 따라 청소한 결과이며, 당신이 입은 옷도,
누군가의 천칭과 함께한다.
당신이 거짓말쟁이 도시의 시민이라면 어떨까? 길거리에는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 가득하며 어제 새로 얻은 집도 자신의 것이라며 우긴다. 끔찍하지 않은가?
그 누구도 일은 안 하고 거짓말로 얻을 것이다. 한번 어기기는 어렵지만, 여러 번은 쉬우니까.
그렇기에 말은 곧 계약으로서 항상 지켜져야 한다.
예외는 존재한다며 반박할 수도 있다.
당신은 계약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말을 거짓말로 더럽히려고 하는 것인가?
모든 말은 당신의 신용이자 얼굴이다.
나는 말을 그 사람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어떤 회사의 면접관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면접자는 어쩌면 당신의 부하 직원으로 일하게 될 것이다. 실력도 완벽하다.
그러나 거짓말이 습관인 면접자를 만난다면?
그 사람을 받아들이겠는가? 나의 저울에 올린다면 실력보다는 진실로 기울 것이다.
그의 모든 실력도 거짓일 수 있기에. 다른 상황을 가정하자.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말한 차별의 말. 성별, 인종, 피부 등 다양한 차별이 존재한다.
그걸 듣는 사람의 심정은 고려했는가?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조건으로 태어난 존재는 없다.
아인슈타인, 뉴턴 같은 세기의 천재도 말이다. 가능했다면 누구나 연예인, 천재일 것이다.
들은 사람은 어떠했을까? 수치스러울 수도, 끔찍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반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나의 일원으로 보자.
그 사람이 어떻든 따뜻하게 안아주자. 그러면 결과는 변할 것이다.
당신은 말과 천칭이라는 무기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마치 전쟁에서 칼로 찌르는 것과 의사가 수술로 살리는 것과 같다.
진실도 같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천칭은 공정한가?
당신이 천칭에 올린 차별의 원천인 선입견은 진정한 당신의 결정인가?
세상의 재판관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절대자로서 인간의 마음을 버리고, 제삼자의 시선으로,
그러나 생명은 동등하다는 인식을 하고 보자.
인간이 벌레를 죽였다. 당신은 어찌 판결하겠는가?
참고할 수 있는 법에 의하면 “죽임”은 살해로 간주한다. 당신은 살해와 관련된 죄를 물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가짐을 버렸다면 심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생명에 값어치를 천칭에 올릴 것이다.
예외는 어떤가? 잠시 후 다음 재판이 열리고 인간이 변호한다.
“왜 저자는 봐주고 저는 안 봐줍니까?”
이번에도 예외를 줄 것인가? 예외를 회수하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반복된다고 생각해 보자. 어느새 당신은 모든 인간을 통과시킬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이더라도 절대적으로 원칙과 계율은 지켜져야만 한다.
또한 이 계율을 정하는 말 또한 하나의 천칭으로서 지켜져야 한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라는 속담 들어보았는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나하나 커지다 보면 결국 원칙과 규율은 유명무실해진다. 진실과 거짓의 문제도 동일하다.
작은 것을 거짓으로 말한다면 추후 큰 거짓을 말하게 될 것이다.
평화로운 하루, 친구가 급하게 달려와 숨겨달라고 하여 당신이 숨겨주었다고 가정한다.
잠시 후 어떤 칼을 든 사람이 찾아와 친구의 행방을 말하라고 협박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진실을 말해 친구가 죽을지도 모르는 위협으로 몰 것인가? 아니면 우정을 중시해 숨겨줄 것인가?
나는 진실을 알려줄 것이다. 대신 친구를 부르기 전 “이봐! 손님이 왔어! 테이블 좀 차려줘! 아차, 식료품이 없구나? 당장 나가서 사와!” 이런 식으로 신호를 보낼 것이다.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거짓을 입에 담지 않았고 누군가를 지칭하지도 않았으니까.
이러면 어떤가?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은 격이 아닌가?
다른 상황을 보라. 몹시 흥분한 친구가 당신에게 맡겨준 칼을 찾으러 왔다.
당신이 칼을 돌려준다면, 어디선가 끔찍한 살인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당신의 선택은 어떨 것인가?
당신과 나의 선택은 크게 다를 것이다.
나는 친구에게 칼을 돌려줄 것이다. 대신 조건을 걸고 말이다.
“칼을 내어주는 대가로 나를 찔러라”
라고 할 것이다.
왜냐고? 절친한 친구가 누군가를 죽인다면 분명 살인자가 될 것이오,
남은 운명을 낭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칼을 맡겼으니 정당한 권리다.
사람은 생각보다 충동적이지만 이성적이기에, 운명을 천칭에 걸고 도박할 것이다.
정말로 절친한 친구라면 나를 찌르지 않을 것이고,
아니라면 친구는 충동적으로 찔러 자기 행동을 돌아볼 기회를 얻을 것이다.
양쪽 어디라도 나는 환영이다.
찔리지 않았다면 인생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친한 존재를 얻은 것이며, 친구가 살인자가 되는 미래를 막은 것이다.
반대라면 나를 찔렀겠지만, 그 결과로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피해를 막았으니, 그것으로 좋다.
나는 세상을 이런 식으로 본다.
그렇기에 내가 하는 말은 상처를 줄 수 있더라도 진실을 강조한다.
진실은 자신을 관조할 수 있게 하며 되돌아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싫어한다면 어쩔 수 없다.
나는 달콤한 말만 해주지 않는다. 당신이 떠나라. 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돌아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돌아와라.
당신이 나의 절친한 친우라면 언제나 당신이 머물 수 있는 쉼터가 되어줄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속의 천칭에 의한 진실과 거짓을 강요받으며 같은 말로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기에 당신은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따뜻함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는 게 진정한 친구이자
거대한 인연의 길의 시작이다.
쉽게 맺어진 인연은 쉽게 끝나기 때문이다.
나는 맹세한다.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존재할 별에 마음속 천칭을 걸고, 진실만을 말할 것.
불가능하다면 시간이 지나더라도 기간 내에 진실로 만들 것.
나의 다짐에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 당신도 진실의 길에 오르는 것이 어떤가?
당신을 진실의 천칭에 올려라. 진실을 실천하는 마음속의 진정한 천칭을 얻을 것이다.
# 다국어 버전
영어 버전은 blog.mirseo.dev에서 확인하세요